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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9/23 (눅 7:18-35) 하나님은 종교의 화려함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신다.

7/29/2023 토요일

· 본문: 누가복음 7:18–35 하나님은 종교의 화려함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신다.

예수님은 앞서서 2 번의 이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보이셨습니다. 백부장의 죽어가는 종을 말씀으로 치유하셨고, 나인 성 과부의 독자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자신의 백성들의 아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아픔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시며 자신이 이들을 구원할 메시야임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천국의 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병든 자를 치료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알리셨는데, 이 소식을 요한과 그의 제자들도 접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을 접한 요한과 제자들, 그리고 그 주변에 유대의 종교인들이 가진 예수님에 대한 의심과 확신에 관한 본문입니다.

(18-23) 18-20절에서는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고 제자들 중에서 2명을 불러서 예수님께 보내어서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19-20)

여러분,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제까지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기대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세례를 주면서 자신이 그의 신발 끈을 메는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에 대한 확신이 약간 흔들리고 있음을 봅니다. 다른 측면에서 요한은 자신의 이런 의심을 예수님께서 보다 명확한 증거로 보여주시어 잡아주시길 바랬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요한의 마음을 아셨던 주님이 자신이 메시야인 것을 명확하게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직접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행함으로 보이셨습니다. “질병과 고통과 악귀 들린자를 많이 고치시고, 맹인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주어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말하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이런 일이 일어 납니다. 모든 병들이 치료됨으로, 부족함이 완전해지고, 연약한 자가 강해지고, 아픔이 사라지고 완전하게 치료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완전함을 주시기 위해서,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뤄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누군가에게 가려져 있고 누군가에게는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할 것은 드러난 복음에 대해서 보고 깨달음을 달라는 요청 밖에 없습니다. 맹인이 눈을 뜬 것처럼, 영의 일에 눈이 뜰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보면,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듣게 되면 깨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 복음으로 그가 실족하게 될 것이고, 그러나그 복음에 눈을 뜬 사람에게는 그 복음이 그를 자유케하고 생명을 주기에 그에게 진정으로 복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복음을 보고도 흔들리지 마시고, 온전한 복음의 진리 가운데 거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4-28) 그럼에도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칭찬에는 동시에 당시의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습니다. 24절-25절을 보시면, 진정한 선지자는 광야 있음을 말씀하시며, 동시에 저 화려한 예루살렘이 있는 궁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음을 비판하신 것 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이 말은 요한을 은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세례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즉 세상의 시류와 사조에 흔들리지 않고 거짓 종교성이나, 보여지는 화려함과 외식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Norval Geldenhuys,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228) . 그런 사람을 너희가 보려고 한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다면 너희가 왕궁에 화려한 옷을 입고 허례 허식하는 자들을 보려고 하는 것이냐? 당시에 사람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외식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삶을 바른 신앙의 모델로 받아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곳에서 지금 신랄하게 당시의 종교인들이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 백성들은 고통 가운데 처해 있는데, 자신들의 외모에만 신경 쓰는 모습 만을 가지고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고, 화려한 옷, 사치하는 자들”의 그 모습이 어떻게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고 믿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25)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속에 함께 하지 못한 그 신앙의 모습이 참된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지금 그 모습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화려한 궁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광야, 그 사막의 한 복판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 세례 요한이 참 선지자며, 메시야인 예수를 소개하는 인물이란 면에서 어떤 선지자보다 더욱 위대한 자인 것입니다.

종교성이 뛰어난 바리새인인이나 율법 학자 보다도, 사막 가운데 고요히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가 오시기를 준비한 세례 요한이 더욱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런 세례 요한 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자들이 더욱 훌륭한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8절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 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준비자라면, 우리는 오신 메시야와 함께 거하는 자이기에 더욱 큰 자입니다.

(29-35)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 사람들의 반응이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한 부류는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의롭다”라고 받아들이고, 다른 부류는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를 했습니다. 유대 종교를 신봉했던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에게는 예루살렘의 제사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죄 사함을 얻어야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어느 변방의 한 요한이라는 사람이 (에세네파) 나타나서, 성전의 제사 행위가 아니라 물로 죄 씻음의 회개를 증거한다고 하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이후에 세례 요한은 죽이는 것에 동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죄를 씻는 다는 것은 획기적인 변화였습니다. 이 획기적인 변화에 동참했던 수 많은 군중들이 있었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중요한 길을 놓았다고 여기셨고, 이에 대해서 옳다하시며 그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니 다들 열광하며, 하나님의 의로움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의 비유로서 주님은 자신과 요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본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시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비유로 사용하여서 설명하셨습니다. 이 아이들은 즐거운 노래에도 슬픈 노래에도 춤도 추지 않고 울지 않는 아무 반응 없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모습이 지금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 즉 당시의 종교인들인 그들이 세례 요한의 메세지에도 반응하지 않았고 예수님 자신의 메세지에도 반응하지 않았던 그 모습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세례요한이 금욕적인 삶을 통해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모습에는 경건한 삶을 사는구나 이렇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귀신들렸다”라고 하며, 반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음과 먹고 마시며 삶을 즐기는 모습에는 “먹자당, 포도주를 탐하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 등 온갖 말로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과 같은 부류가 아닌 사람들을 자신의 편의에 맞게 위선적으로 대하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에 대해서 예수님은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받는 다는 말씀을 하시며, 그들이 어떤 말로 공격하고 행하든지, 지혜 자체는 훌륭한 것이고, 지혜롭게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의로운 일이고 옳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죄 사함의 회개를 외쳤던 것은 그 암흑이 가득한 이스라엘에 필요한 메세지였고, 그가 그렇게 고대했던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복음을 말씀하시며 참된 자유와 기쁨의 메세지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옳은 것이었습니다.

· 생각하는 점: 복음으로 인하여 실족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자유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율법주의로 만들거나 흔들리게 한다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오랜 기간 메시야 오시기를 대망했던 사람도,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잘못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별하지 못할 때에는 다시 그의 말과 행동들을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종교의 화려함 안에 계시지 아니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속에 계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들의손과 발을 씼기고 계십니다. 종교인들의 화려한 옷을 입고 경건해 보이는 그 위선 속에 하나님이 거하지 아니하시고, 진리와 공의가 실현되고 있는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화려한 건물에 갈 것이 아니라 죄인들 속에 거하시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먹고 마시며, 뛰어 노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 해야할 것입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고 죄 사함의 축복이 놓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눈길도 관심도 가장 낮은 곳에 거해야 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죄사함의 용서와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 암송: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7:23)

· 기도: (1) 종교의 허례 허식이 아닌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의 은혜를 간구하며, 화려한 성전이 아닌 저 소외된 사람들의 삶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2) 오직 주님의 말씀 만 의지하며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위하여 (3) 새롭게 개편될 구역과 구역장과 교회 제직들을 위해서 (4) 믿지 않는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서 (5) 주일 예배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예배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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