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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24 눅(14:1-14) 하나님 나라의 삶: 사랑과 호의, 겸손과 자선

본문: 누가복음 14:1-14 (하나님 나라의 삶: 사랑과 호의 겸손과 자선)

(1-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수종병 걸린 사람을 고치신 이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였고 그곳을 주목하여 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수종병 (복부에 물이 차서 심장, 신장, 간장 등을 압박하고 몸이 붓는 병) 사람을 보시며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한 것이냐?” 그런데 그들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들은 대답하지 못했을까? 그들 안에 두 가지 생각이 부딪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안식일에 오직 쉬면서 하나님에게만 예배하며 보내면서 인간의 일을 멈춰야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동시에 사람의 어려움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의 부딪힘입니다. 문제는 안식일에는 급하게 다친 상처나 바로 치료할 수 있는 부위에 대한 것만 시행하게 되어있고, 오랜 시간 동안 아파온 자들의 치료는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일은 굳이 안식일에 안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면서 안식일에 수종병 걸린 사람을 치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답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대답 없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수종병 걸린 사람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에 대해서도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수종병을 걸린 사람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은 안식일의 본 의미가 완전함을 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며 그 안에서 기쁨과 안식과 생명의 완전함과 자유함을 누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생명이 살아나며 자유하는 날입니다. 아픔에서 치료되어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처럼 아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가? 그렇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그 생명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지 생명을 억압하거나 자유를 억제하기 위해서 주어진 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본질을 알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의식이나 제도 보다 앞선 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하나님의 법을 연구한다고 하지만 그 본질인 사랑의 본질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이 아닌 의식과 제도에 그들이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을 넘어서기 위해서 안식일이 세워진 의도와 본질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의식과 법을 이해하고 자유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진리가 바른 것을 행할 용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7-11) 예수님은 계속해서 겸손한 삶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잔치집에 청함을 받을 때 앉는 자리에 대한 것은 평상시의 사람이 가진 겸손과 사회적 지위에 따른 태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당시에는 존중과 겸손이 중요한 이슈였는데, 예수님은 누구나 존중받고 싶어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낮은 곳에 가서 머무르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잔치에 청함을 받을 때 집 주인과 가까운 자리면 자리일 수록 더욱 존중을 받는 자리였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사회적 지위로 인해서 청함을 받으면 당연히 높은 자리로 가서 앉는 것이 몸에 벤 사람들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어찌 보면 말씀으로 섬김의 자리에 있는 자의 관점에서는 올바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영적인 관점에서 누가 하나님 나라에서 더 높임을 받을 것이냐?”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는 자세는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초청을 받는 자리에 갈때에도 낮은 자리에 가 있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낮아짐과 겸손,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의 모습이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적 지위로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과 헌신과 섬김으로 서로를 높여주는 것이 뛰어난 미덕이며 태도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들의 지혜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낮아지려고 해도 그 섬김과 겸손의 모습때문에 존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 것입니다.

(12-14)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진정한 베품과 호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청한 자 바리새인의 수장에게 이르기를, 형제나 친척 혹은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호의가 되갚아질 호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잔치를 베풀어서 아무것도 되갚을 수 없는 자들인 가난한 자들, 맹인 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갚아주지 못하는 것을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6:1-4에서도 구제, 즉 이웃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나눔은 되갚아 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호의와 친절이 베풀어져야 하는 대상에는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들 또한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동체와 함께 하는 방식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처럼 아무 힘이 없는 자들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68편 5절에서는 하나님이 “고아의 아버지이시며 과부의 재판관”이라고 언급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 특히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신명기 10장 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양식과 의복을 주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집단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인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대신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 생각하는 점: 위의 세가지 이야기에는 율법 주의를 넘어선 사랑과 호의를 베풀며, 자만 보다는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마지막으로 이기적인 사회적 관행보다는 진정한 자선(환대)을 베푸는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과 어울림을 보여줍니다. 그런면에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성품인 자비와 양선, 긍휼과 겸손을 따라야 하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기도: (1) 하나님 나라의 삶의 모습인 사랑과 호의 겸손과 자선의 삶이 우리 안에 자리잡기를 위하여 (2) 아직 신앙을 갖지 않으신 부모님과 자녀들, 친지와 친구들이 올 해에는 복음을 듣고 살아가기를 (3) 선교와 전도 봉사와 구제 등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4) 교회와 협력하는 선교사님들 (권종승, 안자현, 심수영)과 후원하는 단체들 (keystone family alliance & Out of the Cold)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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